101회 모르는 것이 약이다!

101회 모르는 것이 약이다!

히포크라테스는 주전 400년경 고대 그리스에서 살았던 의사이다. 그는 당시에 종교적이고 신비적인 방법으로 다루어지던 의술에 학문적인 틀을 세웠고, ‘의사’라는 직업을 만들었기에 ‘의학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그가 만든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오늘날도 전 세계의 의과대학의 졸업식에서 시행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현재의 선서문은 1948년에 제22차 세계의사회에서 개정한 선언문으로 낭송되고 있다고 한다.

  히포크라테스 선서에는 “치료하는 중에는 물론이고 치료하지 않을 때조차도 사람들의 삶에 관해 내가 보거나 들은 것은 무엇이든 결코 발설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서, 나는 그러한 것을 신성한 비밀이라고 여겨, 결단코 누설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비밀 유지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다. 오늘날에도 성직자는 물론, 의사와 변호사, 사회복지사 등 타인의 비밀을 다루는 직종에서는 비밀 유지의 의무를 지키도록 하고 있는데, 이미 2,400여 년 전에 그런 직업윤리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다.

  그러나 나만 알고 있는 비밀을 혼자 간직하고 있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인 듯하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전래동화는 당나귀 같은 귀를 가지게 된 임금님은 모자로 귀를 가리려고 했는데, 이 사실을 혼자 알고 있어야 했던 모자를 만드는 사람은 비밀을 지키고 있는 것이 너무 답답하여 대나무 숲에 가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쳤다. 그 뒤로 바람이 불 때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소리가 숲에서 나서 사람들이 다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의 결말은 백성들의 이야기를 잘 듣는 귀를 가진 임금님이 된다는 해피 엔딩으로 끝이 나지만, 나만 알고 있는 비밀을 발설하지 않는 것이 매우 힘든 일임을 알게 해준다.

101회 모르는 것이 약이다!

  우리 파독 어르신들의 삶은 실로 파란만장한 삶이 대부분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외국인 노동자로 힘들고 험한 세월을 보내오신 분들이 많다 보니, 몇 권의 책으로 자서전을 쓸 수 있을 만큼 많은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계신다. 우리 어르신들의 인생 이야기에는 꼭 아름다운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살다 보니 실수하기도 하고 때로는 감추고 싶은 일들도 있을 것이다. 좁은 동포사회에서 60년 세월을 부대끼고 살다 보니 서로의 관계가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일들도 많이 있었을 것이고, 그렇게 살다 보면 때로는 섭섭함과 서운함도 있고 때로는 억울함도 있는 것이 많은 우리 동포 어르신들의 삶이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 어르신들이 그런 일로 마음 상해하며 힘들게 살 이유가 없다. 남은 시간 동안 서로 사랑하며 의미 있는 마무리를 하며 살기도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존경받는 사회의 원로가 한 방송 대담에서 우리나라의 사회 현상을 진단하며 바르게 나아갈 길을 제시하곤 하셨다. 그러나 그런 진단이 자신들을 비난한 것이라고 생각한 어떤 집단에서 그 원로를 비난하는 황당한 가짜 뉴스를 만들어 유튜브에 올려 비난하자, 주변에서 명예 훼손으로 그들을 고소하라고 하였다. 그러자 사회의 원로이신 어른께서는 ‘내가 그런 가짜 뉴스를 안 보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고, 또 그런 일로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라고 하셨다. 마찬가지로 우리를 힘들게 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것이 앞으로 살아가는 데 걸림돌이 되기 때문에 꼭 해결해야만 하는 일이 아니라면, 모르는 게 약이라고, 눈 질끈 감고 모르는 척 잊고 사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은혜는 돌에 새기고 미움은 강물에 새기라’고 하는 말처럼, 우리 어르신들은 지나간 일들에서 좋지 않았던 기억들은 모르는 척 잊고 살면 좋겠다. 이제 좋은 일들만 기억하며, 감사하고 사랑하며 살아도 시간이 부족한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해로에서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어르신들을 섬기다 보면, 알고 있는 것도 모르는 척 무심하게 지나가야 할 일도 많다. 어르신들의 봉사에 대한 요구가 지나쳐서 힘겨울 때도 있고, 봉사자의 시간과 힘이 제한적이어서 어르신들의 요구사항을 충분히 다 못 들어 드릴 때도 있다. 그러다 보면 사무실이나 다른 경로로 불평과 섭섭한 소리를 하시기도 한다. 고쳐야 할 부분이 있다면 봉사자에게 전달하여 시정되도록 하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아무것도 전하지 않는 때도 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면 봉사를 지속하기 어려워질 수도 있기에, 모르는 채로 봉사를 계속하는 것이 더 나을 때도 있기 때문이다.

 

해로는 파독 1세대 어르신들을 섬기면서 어르신들의 많은 인생 이야기를 듣게 된다. 모두 다 알고 있는 일들부터 혼자만 간직하고 있는 일들까지 새롭게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어르신들의 희로애락의 인생사를 모두 보듬으면서 도와야 하는 해로 봉사자들의 섬김은 보람도 있지만 때로는 힘든 일이기도 하다. 해로에서는 어르신들을 섬길 때, 때로는 꼭 지켜야 하는 비밀스런 내용도 알 수 있어서, 어르신들에게 꼭 필요하고 도움이 되는 일이라도 조심하며 비밀이 유지되도록 직원과 봉사자 교육을 통해 수시로 강조하며 조심하고 있다.

  봉사와 섬김은 단순히 선한 마음만으로는 오래 유지될 수 없다. 봉사단체인 해로가 오랫동안 지속되기 위해서는 꾸준한 교육과 격려가 필요하다. 해로에서는 2024년 호스피스 자원봉사자를 모집하여 지난 4월부터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현재 10명의 자원 봉사자들이 교육받고 있는데, 파독 1세대 어르신들을 가까이에서 섬길 정예 요원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우리 어르신들을 섬기는 자원봉사자들에게 더 많은 응원과 격려가 있기를 바란다.

“경우에 적합한 말은 은쟁반에 올려놓은 금 사과와 같다” (잠언 25:11)

박희명 선교사 (호스피스 Seelsorg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