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회 폭싹 속았수다!
“폭싹 속았수다!”는 제주도 방언으로 “무척 수고하셨습니다”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란 뜻이다. 요즘 넷플릭스 시청률 1위를 달리는 K-드라마 제목이기도 한데, 이 드라마는 가족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로, 시청자들에게 큰 감동과 눈물을 주고 있다.
제주도의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감동적으로 만들어진 이 드라마는, 제주 4.3 사건 이후, 196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전쟁과 사회 혼란 그리고 산업화와 같은 굵직한 사건들을 지나는 현대사의 흐름 속에서 드라마 속 인물들의 삶을 통해 가족과 사랑의 의미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게 해준다.
전쟁고아가 된 주인공 애순의 엄마는 “내 딸은 나처럼 안 살게 할래요!”라고 말하며, 부모의 고생과 헌신으로 자식의 꿈을 이뤄주려는 부모와 자식 간의 따뜻한 사랑과 희망을 보여주면서 뭉클한 감동을 준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우리 어르신들이 살아온 삶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많이 들었다. 주인공의 부모와 같은 연배인 우리들의 부모 세대는 내 자식을 보란 듯이 키워보고 싶은 욕심으로 가난과 일로 힘들어도 참고 허리띠를 졸라매고 억척같이 살아오셨다. 그렇게 키운 자녀들이 중년의 나이가 된 지금 우리 어르신들의 연세는 80을 지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몸과 마음이 연약해지고 아픈 분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런 부모를 바라보는 자녀들의 마음도 안타깝기만 하다. 언제까지나 건강한 모습으로 곁에 계실 것 같았지만, 치매와 암, 장애 등으로 활동이 예전 같지 않은데, 직장 생활로 시간 내기도 어렵고 또 멀리 떨어져 살기 때문에, 부모님을 사랑하고 감사한 마음은 있지만, 도울 방법을 잘 모르기도 하고, 마음처럼 도울 수 없어 늘 미안하고 죄송하기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많은 자녀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고민이기도 하다.
요즘 이런 고충을 가지고 있는 자녀 세대들이 많다. 해로에서는 파독 1세대 어르신들에 대한 돌봄을 하며 관심을 가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인 2세 자녀들이 가지고 있는 부모님에 대한 고충을 도와야 할 필요성을 가지게 되었고, 오랫동안 방법을 찾고 있었다.
지난 3월 13일 저녁에 “해로” (Kultursensible Altenhilfe HeRo e.V.)의 새로운 프로젝트가 시작되는 아주 특별한 만남이 있었다. 해로 부대표인 조은영 변호사께서 치매 부모님과 함께 살아가는 한인 2세들을 초대하여 위로하고 삶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따뜻한 초대와 정성껏 준비한 김밥과 여러 가지 맛있는 음식에 더하여, 참석자들이 케이크도 구워오고 인절미와 과일도 가져와서 풍성한 식탁이 마련되었다.
이 모임은 부모님이 치매를 앓고 계신 한인 2세들이 함께 모여 서로의 마음을 나누고 앞으로 할 일에 대해 나누려고 한인 2세인 조은영 부대표가 주선한 시간이었다. 오래전부터 학교와 취미활동 등 여러 모임을 통해 서로 알고 지냈고, 또 어려서부터 가깝게 지낸 사이였지만, 아프신 부모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날 만큼은 치매로 아픈 부모님을 향한 마음속 깊은 이야기들을 처음으로 꺼내 놓으며 앞으로의 할 일을 나누는 시간이었다. 참석자들 모두 어머니가 정성스레 차려주시던 맛있는 반찬이 가득한 식탁, 그리고 사랑으로 길러주신 부모님과 가졌던 재미있었던 추억과 따뜻한 보살핌의 손길을 떠올리며 감사의 함박웃음을 짓기도 했고, 오랜 간병으로 지쳐가는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치매라는 병은 부모님이 단지 기억을 잃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 기억 속에 있는 부모님의 ‘그분다움’을 하나씩 내려놓게 하고, 부모님의 참모습을 뺏어가는 과정이라 더욱 슬프고 아프다고 했다. 그동안 누구에게 말도 못 하고 각자의 삶 속에서 혼자 감당하느라, 가슴 깊은 곳에 꾹꾹 눌러왔던 삶의 무게를 이제야 함께 나눌 수 있게 되었다며 아쉬워하기도 했다.
치매의 진행 정도나 환경은 각자 달랐지만, ‘나 혼자가 아니구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같이 고민을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었다고 하였다. 다음 날 출근을 앞두고 있었지만, 아쉬움에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밤 10시가 훌쩍 넘도록 대여섯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의 삶에 깊은 공감과 울림을 느끼는 시간이었다.
다시는 맛볼 수 없는 엄마의 음식 손맛이 그립고, 바쁜 일상 가운데 부모님을 자주 찾아뵙지 못하는 죄송함이 깊이 남아 있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법으로 아프신 부모님을 최선을 다해 돌보며 살아가는 모두의 모습이 참 귀하고 소중하다는 것을 확인한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이번 만남은 시작이고, 앞으로도 이처럼 따뜻한 위로와 공감의 모임은 계속될 것이다. 서로 돕고 지지해주는 이런 모임을 통해 더욱 힘을 얻게 되기를 바란다.
해로에서도 4월부터 시작하는 “해로하우스”를 통해 치매 어르신들을 더욱 효과적으로 돕기 위해 다양한 준비를 하고 있다. 시작 초기에는 낮 동안에 어르신들을 돌봐드리는 주간 돌봄 프로그램을 시작할 것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이분들을 더 많은 시간 동안 돌봐드리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다. “폭싹 속았수다!”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라고 말씀드리며, 그동안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오시느라 수고한 등과 어깨를 어루만지며 조금이라도 위로해 드리는 해로가 되기를 소망한다.
“주님은 온갖 환난 가운데에서 우리를 위로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도 하나님께 받는 그 위로로, 온갖 환난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고린도후서 1:4)
박희명 선교사 (호스피스 Seelsorger)
1404호 18면, 2025년 3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