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회 영원한 안식처에서

35회 영원한 안식처에서

„사망시 불에 태우지 말고 그냥 묻어주기. 연락처: ……..“

35회 영원한 안식처에서

지난봄 세상을 떠나신 Y 할머니의 집을 정리하며 찾아두었던 할머니의 자필 메모가 서랍 속에서 튀어나왔다. Y 할머니는 이미 자신의 묫자리를 예약해두고 계셨기에 돌아가신 후 장례절차가 수월히 진행되었던 분이다. 장례식 후 이미 석 달이 지났기에 묘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져서 퇴근길에  할머니가 잠들어 계신 공원묘지에 들러보았다. 그곳은 가톨릭 묘지지만 회교도를 제외한 모든 이에게 열려있는 곳이라 종파를 초월하여 한인 여러분이 잠들어 계신 곳이다. 독일은 동네 안에 묘지가 있어 찾아가기가 수월하다.

평일 늦은 오후라 묘지 내부는 한가하고 고요한데 저만치 보도블록 위에 여우 한 마리가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지난봄에 본, 무명 잔디 묘역 위에서 어미 여우와 함께 봄볕을 쬐며 놀던 새끼 여우 세 마리 중 한 마리일까? 아직 체구가 왜소하고 마른 놈이었다. 놀라지 않게 천천히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으려는데 녀석은 겁도 없이 내 앞을 쓱 가로질러 가더니 근처의 비석 뒤를 돌아 다시 내 쪽으로 슬금슬금 다가온다. 손이 닿지 않을 만큼 떨어진 곳에 멈추어 서서 빤히 나를 쳐다보길래 사진을 찍어주고 가던 길을 다시 갔다.

Y 할머니는 한인 공동묘역에 계신다. 파독 근로 한인 묘역을 조성하기로 공원묘지 측과  합의가 되어 묘지 30기를 한인용으로 한자리에 예약해 두었는데 바로 그곳이다. 한인 묘역에 다다라 꺾어 돌아서는데 여우가 어느새 따라왔는지 뒤에 있었다.

‚배가 고파서 따라왔나? 어디 보자, 가방 속에 먹을만한 것이 뭐 있을까?‘

가방을 뒤지니 점심때 안 먹고 둔 샌드위치가 보였다. 빵을 작은 조각으로 뜯어 바닥에 두고 조금 떨어져서 지켜보았다. 하지만 녀석은 건너편 묘지에서 딴청을 부리며 힐끔힐끔 나를 쳐다볼  뿐 바닥에 떨어진 조각에는 관심도 없다.

‚빵조각이 너무 작았나? 아니면 땅바닥에 떨어진 건 안 먹는 놈인가?‘

샌드위치를 통째로 들어 녀석에서 보여주고 천천히 내리며 도시락통을 바닥에 펼쳐 그 위에 올려두고 조금 물러서서 지켜봤다. 이번에는 녀석이 조심스레 빵 쪽으로 다가왔다. 올타구나. 크고 좋은 빵을 원했었구나!

여우는 빵이 올려진 통을 코끝으로 톡톡 쳤다. 순간 통이 접히며 뚜껑이 닫혔고 빵은 통속에 담기게 되었다. 여우는 통을 열어보려고 애쓰다 안되자 통째로 물었다.

„어머, 얘! 통은 안돼! 통은 돌려줘!“

지켜보다가 깜짝 놀라 도시락통을 받으러 다가오는 나를 본 여우는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열심히 뛰어 여우를 따라갔으나 전광석화처럼 그놈은 사라졌다. 야생동물이 맞네. 정말  빠르다. 쫓아가지 말고 통을 물고 도망가는 모습을 사진이나 찍을걸.. 후회하며 원래 자리로 돌아와 비로소 할머니께 인사를 올렸다.

„Y 할머니, 저랑 여우랑 노는 거 보셨죠? 여기 계시니 찾아오는 야생동물들도 많고 심심하지는 않으시겠어요. 살아생전 혼자서 사시며 적적해하시고 맘고생 하셨던 것 모두 잊고 부디 여기서는 편안하게 쉬세요.“

어느새 여우가 돌아와 건너편 묘지에서 어슬렁거린다. 배고픈 게 아니라 심심했었나 보다.

한인 묘역에서 조금 떨어진 곳의 합동 공동묘역에 묻히신 H 할머니도 찾아뵙고 유골함 묘소에 자리 잡아 예쁜 한글 비석을 세워둔 J 할아버지도 찾아뵙고 얼마 전 아픈 남편을 혼자 남겨두고 갑자기 세상을 뜨신 M 할머니에게도 찾아가 인사를 드렸다. 해로 호스피스와 마지막 길을 함께 하신 분도 계시고 아닌 분도 계시다. 공원묘지 한 바퀴를 혼자 도는데 왠지 누군가와 벌써 한참 대화를 나누고 있는 기분이다.  

35회 영원한 안식처에서

해로 호스피스가 아직 생기기 전에 돌아가셨던 C 할머니 묘지 앞에 서자 장례식 때 그 따님이 한 유가족 인사가 떠올랐다. 한인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독일에서 성장하여 완전히 독일문화에 적응하고 한인 모임에는 안나오는 2세였다.

„한인 공동체는 저희 부모님께는 또 다른 고향이었어요. 명절 때마다 음식을 준비하고 같이 모여 향수를 달래셨는데 마지막 가시는 길에도 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타향살이하는 같은 처지의 한인들이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사단법인<해로>가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글 이정미/ 해로 호스피스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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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포신문 1232호 16면, 2021년 8월 27일

                        

특별 연재] 해로 (Kultursensible Altenhilfe HeRo e.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