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회 인생의 흔적인 사진

29회 인생의 흔적인 사진

퇴근 후 부랴부랴 밥을 짓고 한술을 막 뜨려는데 처음 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E 할머니가 계신 요양원의 주치의라고 밝힌 상대방은 최근 들어 나빠진 할머니 상태를 상의하려고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E 할머니는 치매로 요양원에 계신 분이다. 자녀가 모두 먼 도시에 살고 있어 요양원에는 가까운 사람 연락처로 내

28회 <해로>의 꽃, 자원봉사자

28회 의 꽃, 자원봉사자

“저도 얼른 남자친구가 생겨서 키스해보고 싶어요.” 모태 솔로 자원봉사자 Y 양의 수줍은 고백이다. Y 양은 독일에서 대학을 다니기 위해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바로 독일로 왔다. 그리고 유학 초기, 독일어를 배우는 어학원생 신분으로 입시 스트레스가 많았을 텐데도 자원봉사를 하고 싶다고 비영리 단체인 <해로>를 찾아왔다. 자원봉사자 교육을 시작할

27회  가족의 무게

27회 가족의 무게

어느 날 아침, P 부인이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결국…“ P 부인은 호스피스 환우의 가족이다. 남편이 식도암으로 병원을 자주 들락거리는데 남편이 입원하면 P 부인은 남편이 있는 병원으로 자기를 데려다줄 수 있냐는 부탁을 자주 하셨다. 처음 그분이 우리의 차량 지원을 원하셨을 때 힘이 센 동행자여야 한다는 조건을 거셨다고 한다.

26회  미래를 알 수 없기 때문에

26회 미래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독일인 S 여사를 방문해 줄 수 없겠냐는 지인의 청이 들어왔다. 사단법인 <해로>는 한국인을 우선하여 돕지만 그렇다고 국적에 따라 차별을 두지는 않는다. 지인이 준 주소를 따라 찾아간 그분은 가족이 없이 요양원에 혼자 계신 치매 환우였다. 무남독녀로 자라 독신으로 평생을 살았기에 일가친척이 아무도 없고 젊은 시절에는 독일 연방

25회 호스피스 방문을 마치고 나오는 길

25회 호스피스 방문을 마치고 나오는 길

호스피스 방문을 가는 Y 부인은 말기 암 환우다. 호스피스 환우로서 만나기 훨씬 이전부터 같은 교회를 다니며 알고 지내는 그분은 요리, 행사 준비, 기도, 뭐든지 잘하시는 자매셨다. 한마디로 여기저기로 불려 다니는 만능 재주꾼이었는데 몇 년 전에 발병한 암을 이겨내지 못하여 외출을 못하고 집에만 계신 지 꽤 지난

24회 병원 진료 예약이 이렇게 힘들어서야

24회 병원 진료 예약이 이렇게 힘들어서야

„뚜- 뚜 – “전화 신호가 가지만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는다. 구글 검색으로 찾은 병원의 진료 시간을 다시 확인하고 시계를 보니 진료 시간이 맞는데 전화를 안 받는다. 벌써 3일째 진료 예약을 위해 같은 병원에 전화를 거는 중이다. 결국 전화 예약을 포기하고 인터넷 예약을 하기 위해 병원의

23회 설맞이 식사 한 그릇을 배달하는 길에서

23회 설맞이 식사 한 그릇을 배달하는 길에서

“어어, 저기는 내가 근무하던 병영인데!” 내 옆에서 영국 신사답게 유려하고도 안전한 운전 솜씨를 자랑하던 숀이 갑자기 흥분된 어조를 감추지 못하였다. 우리는 설날을 맞아 80세가 넘은 한인 어르신에게 배달하는 한식 도시락을 배달 가는 길이었다. 코로나가 강타한 이번 겨울은 록다운 조치로 외출의 기회가 원천 봉쇄되어 버린 탓에 집에만 있게

22회 삶이 지나온 길을 되돌아 볼 때

22회 삶이 지나온 길을 되돌아 볼 때

“너는 결혼은 했냐?” 80대 치매 어르신에게 중년의 나는 한없이 어려 보이나 보다. “네에, 저 아줌마예요. 학생이 아니에요.” 뵐 때마다 하시는 똑같은 질문이 벌써 스무 번도 더 반복된 것 같다. 이번에도 역시나 이어지는 레퍼토리는 똑같다. “아기는 생겼냐?” “네, 벌써 아들이 둘이나 있어요.” “어머나, 넌 아들이 있어서 좋겠구나. 난 딸만 셋이 있어.” “이모님, 요즘은

19회 노년과 디지털

21회 인터넷을 배우는 할머니

“그치도 요즘 기계를 좀 볼 줄 알우?” 관절염과 골다공증이 심해 온몸이 아프시다는 H 할머니를 방문해 요양 상담을 하고 있는 중에 어르신은 조심스레 다른 이야기를 내게 꺼내신다. “요즘 젊은 아이들만큼은 잘하지 못해요. 그래도 제가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컴퓨터에 앉아 일을 해야 하니 조금은 해요. 무슨 문제가 있으세요? 아는 만큼

20회 2020 자원봉사자 상

20회 2020 자원봉사자 상

방문을 슬며시 연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분명 얼굴은 보이는데,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다시 만지작거리니 목소리가 들리고 그제서야 세상 속으로 들어온 것 같다. 반가움에 손을 내밀지만 마치 영혼의 것처럼 맞잡을 수는 없다. 그렇게 우리는 작은 화면이라는 프리즘을 통과해 만난다. 돼지해에 복을 가져올 줄 알았던 2020년은 바이러스의 무덤